인천과 바다, 그리고 인천항

인천항역사 관련 사진

인천의 운명이 바다에 달려 있다는 사실은 이미 인천의 옛 지명이 암시하고 있다. 미추홀(彌鄒忽)은 '물의 도시' 혹은 바닷가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바다는 그 자체로 경제적 가치의 원천이자 소통과 접속을 이룰 수 있는 루트이다.

특히 인천은 지형적으로 서해로 둘러싸인 작은 반도로 곳곳에 만이 발달해 있어 해상활동을 펼치기에 적합한 곳이다. 고대 인천의 건설자인 비류(沸流)세력이 남하하여 도읍의 터전으로 삼은것도 소금을 비롯한 다양한 해산물을 얻을 수 있는 데다 해상교통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 때문이었을 것이다.

옛 인천을 중심으로 경기만과 한강하구는 동아시아의 해상교통에 지극히 중요한 장소였다. 인천지역이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다는 사실은 백제 이래 대중국 교류창구로 기능했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삼국시대의 인천은 한반도의 전략적 요충지인 한강유역과 함께 고구려, 백제, 신라가 벌이는 영토쟁탈권의 한 가운데 위치하게 되고, 그 이름도 미추홀에서 고구려 점령당시에는 ‘매소홀(買召忽)’로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뒤에는 ‘소성(邵城)’으로 바뀐다.

세계의 교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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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삼국통일이후 적극적인 대당외교를 펼쳤는데, 당시 이용되던 세 갈래의 뱃길 가운데 인천 연안을 이용하는 북부연안항로가 난파나 조난의 위험이 적었던 관계로 빈번히 사용된 항로의 출발지나 경유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는 해상호족세력을 기반으로 수립한 왕조로서 건국과 함께 도읍을 송악으로 옮기고 예성강을 중심으로 한 해상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벌여 나갔다. 예성강을 중심으로 한 고려의 해상활동이 전개되는 시기에 인천의 영종도와 강화, 교동 등은 예성강의 관문으로 중요한 위치를 담당하기도 한다.

인천의 침체 : 조선시대의 해양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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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개경의 관문역할을 하면서 발전했던 인천은 조선시대로 바뀌면서 침체 상태로 빠져든다. 조선은 대내적으로 자급자족적인 토지경제와 대외적으로는 중국 명나라와 같이 바다를 봉쇄하는 해금정책(海禁政策)을 펼쳤기 때문이다.

이후 200년간의 인천은 자급자족적인 농어촌 사회로 존속하다가 왜란과 호란을 겪은 17세기를 전후하여 국방의 요충으로 떠오르게 된다. 강화도의 경우는 섬 전체가 요새화되었다.

조선후기 일본측의 제물표 개항은 인천이 지닌 정치적 군사적 가치를 고려하여 내린 결론이다. 그리하여 조선의 ‘해문요충(海門要衝, 바다의 전략적 요충)’이자 ‘보장중지’(保障重地, 국가 안전보장에 중요한 땅)였던 인천은 일본에 의해 ‘물화적재’의 땅으로 바뀌어 제국주의의 공간으로 재편되는 길을 걷게 된다.

개항과 국제항구도시로의 재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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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는 강화도 조약에 의해 1883년(고종 20)에 개항되었다. 이로부터 한적한 어촌이었던 제물포는 근대 식민도시로, 국제항구도시로 급속히 변모한다. 개항후 외국과의 무역이 증가함에 따라 1907년에 이르러 인천항은 한국무역총액의 50%에 이르는 국제항으로 성장하였다. 1910년에서 1939년에 이르는 30여년간 인천항의 총무역액은 약 40배로 신장되었다.

해방과 인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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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인천항은 수입항 기능이 활성화되었다. 1946년에는 한국 총수입의 94%, 1948년에는 85%, 1949년에는 88%를 차지하는 등 압도적으로 높은 비중이었다. 해방후 생산이 위축된 상황에서도 인천은 수도의 관문도시로, 각종 산업물자의 조달항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인천항’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인천상륙작전의 현장으로 항만시설과 시가지가 대부분 파괴되어 항만기능을 거의 상실하고 만다.

1973년부터 1978년에 걸쳐 제1단계 인천항 개발사업으로 갑문방파제, 항만도로 포장 등의 시설을 보완하였고, 1973년에는 내항의 제4부두에 (주)한진 및 대한통운(주)의 민간자본을 유치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컨테이너 전용 취급시설을 완공하였다.

1981년부터 1985년까지 제2단계 인천항 개발사업을 추진하여 내항의 일부 부두 안벽 연장 및 석탄부두 조성과 함께 컨베이어 시설, 기중기 등 하역설비를 보강하였다. 양곡전용부두, 싸이로시설, 제8부두 등이 이 시기에 건설되었다.

인천항의 현재와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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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가까이 위치한 인천항은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에 따라 우리나라와 중국간 교역이 증가하고, 경제자유구역 지정 및 항만물류단지 확충이 활발히 진행되는 등 인천 만의 독특한 여건이 형성됨으로써 인천항의 위상을 더욱 높일 수 있는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특히 21세기에 들어서며 외항시대의 선두 인천 남항에 ICT(2선석) 및 SICT(2선석), E1CT(1선석), CJ대한통운(2선석) 등의 컨테이너 터미널을 조성하였고, 북항에는 원목ㆍ고철ㆍ사료용 부원료 등 산업원자재를 취급하는 종합항만으로 총 17선석을 보유하고 있어 집중 처리할 수 있는 부두시설 개발을 완료하였으며, 2015년 6월 인천 신항 1단계 선광신컨테이너터미널이 개장되어 동북아 물류의 중심 거점 항만으로 도약하기 위한 인천항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는 내항에만 의존하였던 항만기능을 분산시키고 규모를 확대함으로써, 항만기능이 정체된 양상을 보이는 인천항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발판이 될 것이다.

또한, 한국과 중국을 왕복하는 10개 국제여객 항로를 개설하여 2011년에는 국제여객 100만 시대를 열었으며 연안 도서지역을 오가는 12개 항로를 운영하여 도서민 등 이용객의 해상교통 서비스 제고에 기여하였다.

미래의 인천항은 항만기능에만 초점을 맞추던 과거와는 달리,「2017년 국제여객ㆍ크루즈부두 조성」및,「장기적 관점의 내항 재개발 추진」등으로 수도권 해양관광ㆍ레저산업의 전초기지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할 것이며,「인천 경제자유구역과 연계」및「2020년 신항 준공」,「고부가가치의 항만 배후단지 개발」을 통해 기업과 화물을 유치하는 등 새로운 물류 흐름을 창출하고, 항만물류서비스의 질과 부가가치를 높여 동북아 물류 중심항으로 거듭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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